단아 스토리에 나오는 '단아 낭자 전설'

2021. 7. 9. 20:46마영전 스토리

단아 캐릭터 소개에서 '은보'와의 대화를 제외한 단아 캐릭터의 전설이야기만 따로 빼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호롱불에서 종종들려준 옜날이야기 어느 '신비한 존재'에 대한 전설

1.단아 낭자 전설

 

 

 

옛날 옛적에.
하늘엔 봉황이 날고 바다에 머리 두 개 달린 거북이 헤엄치던 시절.  

저 높은 구름 위엔 지고하신 신들과 그 명을 받드는 하인인 '하늘사람'이 살았다.

검을 치켜든 신들의 왕께서 ‘하늘왕’, 어둠 그 자체인 신께서 ‘저승왕’이 되어 각각 산 자와 망자를 돌보시니,
이승과 저승 양쪽에서 조화로운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흔히들 '저승' 이라고 하면 메마른 골짜기와 유황불, 험상궂은 도깨비 같은 걸 떠올리고,
곳곳에 벌받는 영혼들이 고래고래 울부짖는 소리가 메아리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저승에 대한 온갖 낭설은 드넓은 저승세계의 작디 작은 일부일 뿐.

 

사실 저승은 여기 이승보다도 훨씬 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사시사철 진귀한 꽃이 피고 달콤한 꿀을 찾아 벌과 나비가 노닐며,
향긋한 산들바람 따라 고운 빛깔 깃털을 가진 하늘새들이 파아란 하늘 위를 떠도는 더없이 신비로운 세상이다.

 

우리가 죽어 저승새의 등에 오르고 나면
그들은 창공을 높이 날아, 어느 넓고 깊은 강 어귀에 선 말없는 사공 앞에 우리를 내려준다.
그를 따라 작은 조각배에 몸을 실으면 어느덧 잔잔하던 푸른 강은 파문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흐르기 시작한다.

바람을 가르고 푸른 강을 건너 건너 한참을 가다 보면 어느덧 저 멀리 크고 웅장한 문이 보이는데,
철갑을 두른 용맹한 무사들이 양 옆으로 늘어서 지키고 있는 거대한 문.
이곳이 바로 저승의 입구, '저승문' 이구나.
이 문턱을 넘고 나면, 비로소 우린 정겨운 모든 것과 영원히 작별하게 된다.

문 너머는 곧바로 기나긴 '저승길'.
전 생애를 속속들이 되돌아볼 수 있을 만큼 기나긴 길.
이 길을 제 두 발로 곧장 걸어가면 지고하신 저승왕의 '심판대' 에서 심판을 받게 되니
살아 생전 존경 받는 부호였건 길가의 거렁뱅이였건 지엄한 심판의 결과, 극락과 지옥을 피할 순 없구나.

눈물로 한 걸음. 한숨으로 두 걸음. 미련으로 세 걸음.
두려운 발걸음을 옮기는 영혼들을 달래주는 건,
오직 길 양옆에 펼쳐진 드넓은 저승의 '꽃밭' 뿐이다.

아름다운 저승의 '꽃밭' 엔 진귀한 꽃들이 아주 많았으니,
개중엔 새 살을 돋게 하는 꽃, 질병을 낫게 하는 꽃, 망자에게 다시 숨을 불어넣는 꽃처럼 귀중한 꽃도 있고
곧 태어날 아기의 영혼이 깃든 꽃처럼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꽃도 있었다.

 

그러니 꽃밭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꽃을 노린 도적이 출몰하였다.
재물을 탐하는 데엔 종의 구분이 없으니 인간이고 마족이고 할 것 없이 구도를 보내어 일확천금을 노렸다.

난폭한 도둑이 모여 한바탕 휩쓸고 나면, 순식간에 꽃밭은 난장판이 되는데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그 피해를 복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저승의 꽃밭엔 언제나 호위무사가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저승의 일꾼인 하늘사람, '꽃밭지기 무사' 이다.

이 특별한 무사들은 저승왕의 명을 받아 밭에 머무르며 꽃밭과 꽃들을 수호했다.
두꺼운 갑주를 입고 저승왕에게 하사받은 신묘한 칼을 멘 이들은 저승에서도
주야장천 꽃을 돌보고 길가는 영혼을 감시하며 제 본분을 다하였다.

이야기의 주인공, 우리의 '단아' 낭자는 이 꽃밭지기 무사 중 하나로,
저승의 수많은 무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특출난 무인이었다.
낭자는 생사의 질서를 지켜내는 지엄한 명을 받들어,
높은 곳에 위풍당당히 서서 드넓은 꽃밭과 저승을 오가는 영혼을 돌보았다.
본연의 신묘한 능력과 강단 있는 성정으로 주어진 일을 능히 해내니
저승의 왕께서도 낭자를 무척이나 어여삐 여기셨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꽃밭을 순찰하던 낭자의 귓가에 낯선 소리가 들려 왔다.

우우-

하는 작은 들짐승의 신음 같기도, 도둑놈이 자빠져 우는 소리 같기도 한 소리.
그 수상한 소리를 따라 걸어 무성한 꽃줄기를 헤치자 무언가 수상한 게 보였다.
생채기 가득한 조막만 한 손발, 피와 흙먼지가 엉겨 붙어 산발이 된 머리칼, 그리고 부드럽고 허연 볼.
상처 입은 짐승처럼 한껏 웅크려 끙끙대는 것은 바로 인간의 아이가 아니던가.
그것도 따뜻한 피가 온몸을 도는, 아직은 숨이 붙어있는 자그마한 인간 아이.

단아 낭자는 크게 당황했다.
이승에서 온 온갖 꽃 도둑을 보아왔으나, 이 저승의 꽃밭에 '살아있는 인간 아이'가 온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인간 아이란 으레 죽어서만 저승문을 넘어올 진 데, 어찌하여 이토록 험한 꼴을 하고 여기에 있단 말인가?
이 아이를 저승의 침입자로 간주해 마땅한 것인가?

…그래.
모든 건 저승의 법도대로 흘러가야만 한다.
저승의 법에 따르면, 산 자가 생과 사의 질서를 해치고 저승에 들거든
즉시 육신을 빼앗고 그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라 하였으니,
아무리 작고 연약한 어린아이라도 예외는 없는 것이다.

낭자는 결심한 듯,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검을 쥐어 아이를 향해 휘두르려는 순간.

"… 어머니……."

갈라져 피맺힌 아이의 작은 입술이 오물거렸다.

… 어머니. 어머니….

구슬프고 처량하게 부르는 작은 소리에 낭자의 손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본래 저승의 무사들은 죽음을 업으로 삼는지라 성정이 냉하고 감정에 무디다.
그러니 아이의 울음 따위는 무사들에게 있어 길가의 귀뚜라미 울음소리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 허나 어째서인지, 무사가 된 이래 처음으로 낭자는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려치려 하여도 손이 도저히 움직이질 않는 것이, 마치 강한 힘이 작용하여 두 손을 뒤로 당기는 듯하였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낭자는 결국 뽑은 칼을 칼집에 돌려놓고 말았다.

내 칼은 오직 꽃을 노리는 도적을 베는 칼.
이 아이가 도적임이 명확해지고 나면, 그때 베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낭자는 아이를 처분하는 대신 두 팔에 안아 올렸다.
그리곤 무서운 지옥이 아닌 꽃밭 근처의 자신의 초소로 아이를 데려가, 깃털처럼 보드라운 침상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아이가 다시 기운을 차릴 때까지 낭자는 아이의 곁을 지켰다.
때론 마른 입술에 물을 흘려주고, 흐르는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극진히 돌봐 주었다.
가까이서 보는 아이의 몰골은 밭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욱 참담하였다.
온몸엔 상처투성이, 밤톨처럼 동그랗고 앳된 모습은 겨우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웃음만 가득하여도 모자랄 터인 얼굴 위론 생기는커녕 진득한 수심만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대체 어찌 이런 작고 어린아이가 험난한 길을 뚫고 저승까지 왔을까.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험을 했을 테지.

작은 생명이 만들어 내는 숨결에 마음이 강렬하게 이끌린 것인지, 낭자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리곤 눈을 감고 꼬옥 쥔 손을 자신의 볼에 살포시 가져다 대었다.
숨이 붙어있는 아이를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 걸까.
보드라운 살갗 너머로 들려오는 두둥 두둥 강인한 생명의 노래. 숨을 내쉴 때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쌔액 쌔액 소리.
저승의 무사의 차가웠던 마음은 말랑한 손끝을 타고 오는 온기에 구들방의 온돌처럼 서서히 덥혀지기 시작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우리 아기 잘도 잔다.
낯설고도 그리운 노래를 흥얼거리며 낭자는 아이 옆에 아주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하늘 나으리, 부디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세요!"

마침내 눈을 뜬 아이는,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별안간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더니
낭자 앞에 넙죽 엎드려 외쳤다.

"나는 '밤이'에요.
올해 나이 다섯이고,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어요.
가난하지만 어머니와 손잡고 행복하게 살아왔는데,
얼마 전 어머니는 들이닥친 도적의 칼에 그만 죽고 말았어요.

홀로 빈 집에 덩그러니 남고 나니
눈 감을 때마다 두 눈 부릅뜨고 피 토하며 죽던 어머니 모습이 보이고
귀를 막아도 어머니 원통한 비명소리가 들려와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머니를 다시 찾기 위해
시체에 돌돌 말린 멍석에 숨고,
저승새의 깃털 사이에 숨고,
죽은 할배의 다 삭아서 너덜너덜해진 도포 자락에 숨어,
가끔 숨을 참고 자주 눈물을 참으며 여기까지 왔어요.

하늘 나으리.
부디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만일 어머니 손 잡고 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여기서 죽어 어머니와 함께 있도록 해주세요.

저는 이제 홀로 남는 건 싫습니다.
죽기보다 싫습니다."

아. 차라리 펑펑 울며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벌건 낯으로 울며불며 떼를 썼다면 쉬이 차가운 마음 먹고 멀리 밀어냈을 터인데.
그러나 아이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마른 장작처럼 가슴 속 불씨를 댕기고 거대한 화마를 일으켜,
이제 낭자의 가슴 안은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긴 세월 동안 저승의 길목을 지키며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수만 가지 영혼들을 보아 왔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이는 없으며,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없다.
그런데 왜 이 아이의 사연만은 나의 가슴을 이토록 미어지게 만드는가? 대체 무엇이 그리도 특별하기에…?
그러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 사실 낭자의 마음 깊은 곳은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
처음 아이와 마주한 그 순간, 낭자는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머나먼 태곳적 하늘사람이 되던 어느 날 저승왕의 손에 덧없이 지워진 '이승의 기억'을.
그러나 너무 깊게 뿌리 내려 미처 지워지지 못한 기억의 부스러기 안에
오랫동안 곤히 잠들어 있던 '어느 그리운 존재'를.

…그렇구나, 먼 옛날 내게도 있었을지 모른다.
중대한 하늘의 의무와 맞바꿔야만 했던,
지상에 홀로 남겨두고 온 작고 애달픈 미련. 못다 이룬 꿈.
이제는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귀하고 사랑스럽던 나의-

"…아가…."

단아 낭자는 팔을 뻗어 마치 귀중한 것을 대하듯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네 어미를 돌려주마."
"정말인가요, 하늘 나으리? 정말로 저를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래. 정말이다."

내내 웃지 않던 아이의 낯 위로 그제야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동시에, 여전히 한기가 남아있던 낭자의 눈에도 비로소 따스한 빛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낭자는 해말간 볼 위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손으로 닦아주며 다짐하듯 힘주어 덧붙였다.

"더는 홀로 남아 슬프지 않도록 내가 너를 보살피겠다. 약조하마."

이루지 못한 이승의 인연.
어느새 단아 낭자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못한 미련에 모든 것을 걸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꽃밭지기 무사, 단아 낭자는 꼬마 '밤이'와 함께 길에 올랐다.
본래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나,
낭자는 등에 업힌 아이를 긴 머리칼로 덮어 감쪽같이 감춘 뒤 저승길 끝 망자의 심판대로 향하였다.
길은 멀고 넘어야 할 관문은 많은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매서운 감시자들로부터 아이를 지켜야 하는 상황.
그러나 하늘사람인 낭자에겐 난관을 타개할 특별한 능력이 있었으니
바로 '신칼'을 이용해 영혼을 다루는 힘이었다.

저승왕이 하사하신 이 신칼은 일종의 무구로서,
본래 형체가 없는 영혼을 눈에 보이게끔 만들고
영혼들이 칼을 든 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는 신묘한 힘이 깃들어 있는데,
뛰어난 무사였던 단아 낭자는 무구에 깃든 힘을 거꾸로 이용하여
자신을 영혼처럼 만들어 허공을 날거나, 칼에 영혼들을 불러 모아 거센 돌개바람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본래 꽃밭과 저승의 질서를 지키는 데만 사용한 능력.
그러나 이제 낭자의 칼날은 저승의 질서가 아닌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같은 저승의 무사들을 겨누었다.
날으는 도에 자신을 실어 걸음으론 몇 날이 걸릴 거리를 단숨에 날고,
맹렬한 돌개바람을 날려 관문지기들의 눈을 가리면서 낭자와 꼬마 밤이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더러 살아있는 인간의 기척을 눈치채는 존재들도 있었으나 걱정할 건 없었으니,
신칼로 하여금 낭자의 의지를 따르게 된 영혼들이 모여들어 밤이의 기척이 드러나지 않도록 포옥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저승의 심판장에 당도한 낭자와 밤이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극락과 지옥으로 가는 갈림길 주변으로 다가올 심판을 기다리는 영혼의 대열이 길게 늘어서 있는 가운데,
창백한 낯 사이에 숨어들어 한참을 두리번대던 아이가 마침내 떨리는 소리로 말하였다.

"저기…! 저 갈래길에 우리 어머니가…!"

저기 저 멀리, 꼬마를 똑 닮은 한 여인의 영혼이 영롱한 빛이 어른대는 길 위를 걷고 있었는데,
그는 막 이승의 업을 벗어 던지고 영원히 극락 세상으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금쪽같은 자식이 기어코 저승까지 따라서 온 걸 보자, 아이의 어미는 그만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이 어린 것을 두고 홀로 극락에 들 순 없습니다.
어미 없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내 자식을 두고 어떻게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쇤네는 다시 이승에 돌아가겠습니다.
또다시 죽어 지옥 불에 태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가 내 아이, '밤이'의 곁에 남겠습니다."

어머니의 영혼은 단아 낭자 앞에 무릎 꿇고 간절히 빌었다.
지치고 고된 삶 끝에 비로소 극락으로 떠날 수 있게 됐건만,
아이의 어미는 기꺼이 영원한 행복과 찰나의 행복을 맞바꾼 것이다.
…이 애끓는 마음을, 깊은 정을 낭자라고 모를까.
그 옛날, 하늘 가던 날.
그녀 자신도 바닥에 넙죽 엎드려 말했을 터다.
'이 어린 것을 여기에 두고 어찌 홀로 하늘에 들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눈물은 이승에서 마저 흘리고, 지금은 나를 따라오세요."
단아 낭자는 재빨리 여인의 영혼을 일으키곤 흐르는 눈물을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그리곤 다시 아이를 등에 업고 어머니의 영혼을 신칼에 거두어, 왔던 길을 되돌아 저승의 강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출발할 때만큼 순탄치 않았다.
이미 수상한 움직임을 보고받은 저승의 무사들이 일제히 낭자의 행보를 뒤쫓고 있는 데다
따가운 감시의 눈총에서 두 명을 한 번에 지켜야 하니, 낭자가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허나 낭자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날카로운 화살이 갑옷을 뚫고 몸에 박히고, 머리 여러 개 달린 괴수가 다리를 물어뜯어도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낭자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앞을 향해 전진하였다.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이승과 이어진 강'을 향하여 피 묻은 발걸음을 힘겹게 옮겨 나갔다.

저승문 앞 강어귀엔 보랏빛 여명이 드리우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하여 적을 막아낸 단아 낭자는 고된 줄도 모르고 서둘러 작별할 준비를 하였다.
물 위로 꽃줄기를 엮어 만든 조각배를 띄운 낭자는,
저승의 꽃밭에서 따온 꽃송이를 곁에 있던 영혼의 이마에 슬쩍 문질렀다.
그러자 곧 아이의 어머니의 창백했던 낯에 혈색이 돌아오고 흐릿했던 눈에 생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여인이 감격스러운 한숨을 토해내자 낭자는 깊이 안심하며 말하였다.

"이 강을 건너면 다시 이승입니다.
죽은 영혼이 명부에 없는 새 육신에 깃들어 저승문을 나섰으니,
저승의 존재들도 그대 모자를 쉬이 찾진 못할 것입니다.
추격이 가까워지기 전에 어서 강을 건너 여길 떠나세요."
"고맙습니다, 하늘 나으리.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둘이서 주어진 명대로만 오손도손 사세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것 하나뿐입니다."

낭자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손을 잡아주곤 이번엔 꼬마 밤이에게 다가섰다.
보드랍고 해말간 아이의 얼굴 위 수심은 어느덧 걷히고 어머니를 되찾은 기쁨만이 들어차,
실로 어린아이다운 해맑고 예쁜 웃음이 만면에 떠올라 있었다.

"아가야. 네가 곁에 와준 덕에 나는 실로 기뻤다. 이건 너에게 주는 작별 선물이니 받아주렴."

그렇게 말하며 낭자는 아이의 옷섶에 붉은 꽃 한 송이를 넣어주었다.

"이 꽃은 귀하디 귀한 하늘의 꽃. 이걸 달여 먹으면 어떤 병이든 치유할 수 있단다. 혹여 네 어미가 또다시 네 곁을 떠나갈 것 같으면 그때 이 꽃을 사용하 거라.
그럼 다시는 외로이 홀로 남지 않게 될 게다. 알겠니?"
"…나으리…."

내내 꾹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기라도 한 듯 꼬마 밤이는 눈가를 연신 문질러 대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늘 나으리. 어머니를 돌려주시고 저희를 지켜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아니, 다 잊어도 좋다. 다 잊고 부디 행복하기만 하려무나."

밤톨 같은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낭자는 아이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꼬마 밤이도 꼬옥 쥔 주먹 손을 내려놓곤,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낭자를 향해 씨익 웃었다.
낭자와 아이의 짧고도 깊은 인연은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우스운 얼굴이 되어
저 멀리 떠오른 아침 해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렇게 단아 낭자와 모자는 작별을 고했다.
낭자는 모자를 태운 조각배를 잔잔한 강 물결 위로 띄우곤 멀어져가는 형체를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승 무사들의 함성이 점차 커지고 온몸에 포승줄이 칭칭 감기는 동안에도 낭자는 강에서 시선을 거둘 줄을 몰랐다.

아, 대체 이 감정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이 감정은….
무사로서 본분을 저버리고 저승왕의 명을 거역한 것에 대한 죄책감인가?
아니, 이건 죄책감이나 허무 같은 무거운 감정이 아니야.
오히려 오랜 염원을 풀어내고 깊은 갈망을 해갈한 듯 후련하고 홀가분한….
저승의 무사로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그때, 귓전에 '까르르'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느껴지자
낭자는 비로소 깨닫고야 말았다.

…그렇구나. 이건 '만족감' 이로구나.
본분이 아닌 마음에 오롯이 충실하고 보상을 받아 생겨난 깊은 만족감.

나는 그저 아이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야.
지상에 홀로 남겨두고 온 작고 애달픈 미련, 못다 이룬 꿈 대신
눈앞의 그 아이가 웃길 바랐던 거야….

눈 부신 해를 등지고, 무사들의 손에 끌려 심판대로 향하며 낭자는 벅찬 마음으로 끝없이 되뇌었다.

이제 나에게 후회는 없다.
후회는 없어.

그날, 단아 낭자는 지고하신 저승왕 앞에 무릎 꿇었다.

저승왕께서 말씀하시길,

"미련한 꽃밭지기야. 인간은 '잠깐 피고 지는 들꽃'에 불과하거늘.
어찌 그들을 위해 생사의 규율을 거스른단 말이냐.
저승의 질서가 무너지면 세계의 질서도 무너지는 걸 네가 정녕 모르느냐."
"……"
"게다가, '죽음을 거스르는 자'는 죽음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저승의 무사인 네가 모를까?
이제 그들의 영혼은 네 망동으로 인해 영원한 지옥의 불길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 모자가 죽어 다시 저승에 오거든, 그 둘은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니."

매서운 불호령이 검은 두건을 넘어 저승왕의 거처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거기에 있는 모든 이가 두려워하며 다리를 후들거렸다.
그러나 낭자는 덤덤히 앉아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할 뿐이었다.

"생과 사를 관장하는 저승의 왕이시여. 질서의 수호자시여.
제가 그들의 벌을 모두 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마음이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하였으니 소인은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이런 소인의 불충과 망동에 형벌을 더하시고, 저 가엾은 모자에겐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곡히 비나이다."

반성의 기미는커녕 총기로 가득한 두 눈을 보자 저승왕께선 진노하며 깊이 탄식하시었다.

"불경한 것. 네가 하늘사람이 된 지 한참이 지났거늘,
어찌하여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고 인간일 적 습성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가.
내 너를 어여삐 여겨 지금껏 아껴왔건만, 이제는 그 어리석음이 차마 용인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너는 응당 생사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저승의 법을 업신여긴 죄를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신 후 이어서 큰 소리로 모든 저승에 이르시길,

"들어라. 저승의 질서를 어긴 자는 천벌로 엄히 다스리는 것이 이 지하세계의 법도. 네가 그리도 벌을 받고 싶다면 그리하라.
침입자를 비호하고, 저승의 물건을 남용하며, 죽은 자를 되살려 저승의 질서를 어지럽힌 중죄.
그에 더하여 너는 인간 두 명분의 벌을 함께 받으리라.
너는 지옥의 불길에서 형기를 마친 후, 영원히 이승에 유배될지어다.
그리고 연약한 인간의 몸에 갇혀 죽지 못한 채 슬픔과 분노, 굶주림과 고통, 질병의 공포를 무한히 겪으라.
실로 죽고 싶더라도, 너는 결코 저승 문턱을 넘지 못하리니 네겐 극락과 윤회 또한 허락되지 않으리라."

지옥 불, 이승으로의 유배.
거기다 죽지 못해 살도록 만드는 잔혹한 '불사의 저주'.
낭자에게 내린 무시무시한 선고는 온 저승에 일순간 싸늘한 침묵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단아 낭자는 형벌 따윈 개의치도 않으며, 불꽃처럼 타오르는 저승왕의 눈을 직시하곤 재차 물었다.

"제가 그 모자의 벌을 다 받고 나면, 분명 그들은 정당한 심판을 받고 극락에 들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래. 내 너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이니 이를 물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제야 낭자는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되었다.
나는 나 하나의 고통만으로, 모자의 행복을 온전히 지켜낸 것이다.

"…허나, 업은 더 큰 업을 낳는 법."

무사들의 손에 붙잡혀 지옥으로 떠나려는 낭자의 등 뒤로 무겁고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 형벌의 진정한 무서움은 육신의 괴로움에 있지 않으니, 그 의미를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낭자의 마음 안엔 여전히 밝게 빛나는 아이의 맑은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서릿발 같은 저승왕의 말 따위는 삽시간에 사르르 녹아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시시각각 살과 뼈를 불태우는 맹렬한 화염, 들끓는 용암, 달궈진 사슬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엇도 낭자 안에 자리한 아이의 웃는 얼굴을 거둘 수는 없었다.
지상에 짧게 피고 지는 들꽃을 사랑한 무사는 그들의 행복을 간절히 염원하며
지금 겪는 이 고통이 곧 모자의 행복이리라 믿고 무서운 형벌을 견뎌내었다.

이후, 지옥에서의 긴 긴 세월이 흘러 마침내 단아 낭자는 이승 땅을 밟았다.
모든 걸 박탈당한 채 인간의 육신에 갇힌 낭자에게 남은 것은
신칼 한 자루와 망자와 소통하고 영혼을 다루는 미약한 하늘사람의 힘뿐이었다.

인간의 육신을 하였으나 불사의 저주로 인해 죽어도 저승에 들지 못하게 된 낭자.
낭자는 평범한 인간처럼 심한 상처를 입거나 병에 들어 숨을 거두어도
그 영혼이 저승의 입구에서 쫓겨나 고통 속에 되살아날 수 밖에 없는 기구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육신이 되살아나는 끔찍한 고통은 감히 지옥 불과 견줄 정도여서,
낭자의 삶은 이승에 있되 반쯤은 지옥에 걸쳐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망자들과 어울리며 몇 번을 죽어도 죽지 않는 여인을 받아주는 인간은 없었다.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인의 존재는 인간에게 있어 공포와 질시의 대상이었고,
드물게 호의를 보이는 인간이 있어도 이내 낭자를 두려워하거나 해치고 싶어 하였다.
결국 가엾은 낭자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홀로 쓸쓸히 지상을 떠돌게 되었다.
오래전 만났던 소중한 인연, 이제는 세월이 너무 흘러 세상을 떠났을 모자를 떠올리며 외로이 살아가게 되었다.

원망이 쌓일 만도 하건만, 외려 단아 낭자는 인간의 유한한 삶에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
인간 세상엔 한 맺힌 영혼, 그리고 옛날 자신을 찾아온 아이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낭자는 자신의 신칼과 미약하게 남은 하늘사람의 능력을 활용해 '만신'이 되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돌보는 수호자가 되어
주어진 운명의 의미를 찾아 나갔다.

2.아이와 어머니가 이승으로 돌아온 이후 뒷이야기

 

낭자와 헤어진 후, 꼬마 밤이는 어머니와 무사히 지상에 돌아왔다.
죽었던 이가 그 어느 때보다 생기로운 모습으로 살아서 돌아오다니.
사람들은 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하늘의 보호를 받았다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모자는 힘을 합쳐 다 쓰러져가는 집을 고치고 버려진 밭을 일구어 다시 생계를 이어갔다.
특히 낭자가 선물한 귀한 하늘꽃은 모자에게 길운을 안겨주어,
비어 있던 곳간엔 차곡차곡 쌀이 채워지고 거미줄 쳐진 궤짝엔 금전이 모여들었다.
원체 소박하고 정이 많던 아이의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이웃과 부를 나누었고,
마을의 모두가 이를 기뻐하며 하늘꽃이 불러온 기적이라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약간 흐르자, 이 '기적'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모자에게 찾아온 부와 행복을 질시하는 이들이 모여 수군대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해, 마을에 대 흉년이 들자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을 향해 말하였다.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이 흉년은 우리 마을에 내린 하늘의 저주야.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니 하늘이 노한 게야.'
'나는 애당초 그 모자가 싫었소. 원래 우리가 가져야 할 몫을 자기가 다 차지하고는 선심 쓰듯이 나눠주는 꼴이란.'
'맞소, 애초에 그 하늘꽃을 나누면 다 같이 부유해질 텐데. 혼자 행운을 독차지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오?"

이어지는 흉년에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이 말에 쉬이 동조하여 모자에게 멸시의 화살을 겨누었고,
모자는 순식간에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밤, 마을의 장정 여럿이 횃불과 몽둥이를 들고 아이의 집 마당에 모여들었다.
겁에 질린 아이와 어머니를 흙 바닥 위로 끌어내어 물은 건, 바로 하늘꽃의 행방이었다.


'그 꽃은 저희 어머니를 살리는 꽃이어요! 하늘 나으리와 약속했어요. 이 꽃은 반드시 어머니를 위해서 쓰겠다고요! 그러니 제발 꽃을 빼앗지 말아 주세요.'

아이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자, 이내 장정들은 '잔혹한 회유책'을 쓰기로 했다.
둔탁한 타격이 마당에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자,
짓밟힌 끝에 고통을 이기지 못한 아이는 결국 황금꽃을 무뢰배들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야, 이 놈이 드디어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이리 피떡이 다되어서 내어줄 거면 진즉 제 어미 사지가 멀쩡할 때나 줄 것이지. 미련한 놈.'

탐욕스러운 손들이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나와 제각기 꽃잎과 줄기를 뜯어내자,
하늘꽃은 몇 초 뒤엔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작은 부스러기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자, 이제 어쩌면 좋지? 의원이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내버려 둬. 어차피 한 번 죽었다 산 몸인데 뭐. 먹이 찾으러 온 들짐승들이 알아서 해결할 게야.'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잠깐. 이 녀석을 흉년을 물리칠 제물로 쓰면 어떤가?'
'그거 좋은 생각이다. 어차피 죽을 몸이라면 쓰임새라도 있어야지.'

잠시 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아이는 검은 항아리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곤 작은 밥 덩이를 항아리 입구 위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둔 채 제각기 갈 길을 가버리고 말았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으로 윙윙대는 뜨겁고 깊은 항아리 속에서,
아이는 다 쉬어버린 밥 덩이에 애타게 손을 뻗다가 혼절하기를 반복하였다.
때론 항아리를 깨보기 위해 작은 주먹으로 유리를 두드리기도 하고, 빽빽 울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봐 주는 이는 없었다.
이미 숨을 거둔 어머니도 아이를 도울 순 없었다.

이렇게 차가운 무관심 속에서, 아이의 생명은 소리 없이 꺼져갔다.
점점 붉게 물드는 두 눈, 가죽만 남아 검게 변해가는 몸으로 맞이하는 생애 마지막 순간.

너무 짧고 너무 다난했던 인생의 끝에서, 아이가 떠올린 것은 오직 하나.

분노.
매서운 분노뿐이었다.

갓 태어난 악귀를 잡아 가두기 위해 항아리 뚜껑을 열었을 때, 항아리 안에서 솟아난 검은 어둠은
차례로 주위 사람들, 곁에 있던 어머니의 시신, 종래엔 마을을 통째로 집어삼켰다고 한다.
마른 들에 화마가 번져나가듯 분노는 그칠 줄 모르고.

결국, 분노에 눈이 먼 아이는 이제 자신이 왜 분노하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된 채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

 

3.악귀가 된 아이와 단아가 이승에서 만난 이야기

 

소년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자신은 조막만 한 검은 형체와 붉은 두 눈을 가진 무언가였는데,
가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목놓아 엉엉 울고 있었다.
해묵은 분노를 쏟아내고 푸른 돌개바람이 고통을 하늘로 흩어 보내어 마음속 응어리가 한결 풀렸건만.
그럼에도 붉게 물든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당최 그칠 줄을 몰랐다.

그때, 물기 어린 시야에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나먼 옛날, 저승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인 여인은
날카로운 것에 갈기갈기 찢긴 피 묻은 옷을 걸치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얼굴을 하고선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듯 응시하며 환히 웃고 있었다.
하얀 손이 슬며시 다가와 자신의 추악한 몸체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실로 오랜만에 자신을 보듬는 손길이 그립고 슬퍼서 그는 아기처럼 엉엉 목놓아 울고 말았다.

품에 안겨 얼마나 울었을까.
여인이 손을 들어 어느 방향을 가리키자, 저 너머로 하늘을 향해 푸르고 길게 이어진 길이 보였다.
그 길은 분명히 언젠가 자신이 건넌 적 있는 길이었다.
한 번은 저승새의 등에 올라, 또 한번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지났던 머나먼 안식의 세계로 떠나는 길.

그러나 어쩐지 거기에 오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자, 여인이 놀라며 물었다.

"떠나는 게 싫으니? 저승에서 갚아야 할 업은 내가 일전에 전부 받았으니 두려워할 것 없단다. 게다가 저승에 가면 네 어머니와 재회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거부하듯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어떠한 말로 회유하더라도 다시는 저 길 위로는 오르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혼자서 외롭게 눈물 흘리며 저승길에 오르는 것만은 절대로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구나, 예쁜 아가. 이대로 저승에 오르기는 싫은 모양이구나."

마음을 들여다보는 따스한 시선이, 울먹이는 붉은 두 눈에 한참을 머물렀다.

"알았다. 네 마음이 정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만큼 이 세상에 머무르려무나. 내가 너를 거두어 '태주'가 될 터이니.
네 마음속 남은 응어리가 전부 사라질 때까지, 여기 이승에서 기쁘고 보람된 기억을 더 많이 만들어 나가보자꾸나.
그리하여 네 허망한 삶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나의 삶. 그 의미를 우리 둘이서 함께 만들어나가자 꾸나."

그리고는 사근한 음성으로 다정히 이름을 불러주었다.

"나의 소중한 '밤이'야."

곧, 철컥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찬란한 푸른 빛이 검은 몸을 휘감고
그는 여인과 신비한 칼 사이를 이어주는 푸른빛이 되어 칼과 여인 사이에 녹아들었다.

이제 내내 슬펐던 영혼은 여인의 칼에 얹혀 새 꿈을 꾸려 한다.
고통만이 가득하던 기억 위로 형형색색의 웃음이 그려질 그 날까지,
따스한 여인의 곁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기나긴 길을 걸어 나가려 한다….

 

 

https://heroes.nexon.com/Guide/character

 

캐릭터소개 : 게임정보 : 마비노기 영웅전

캐릭터소개 HOME>게임정보>캐릭터소개

heroes.nexon.com